사람의 선택에는 늘 배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한 사람의 말 한마디, 삶의 태도 하나가 깊은 울림이 되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꿉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한번씩 보셨을 MBC경남이 제작한 다큐 ‘어른 김장하’에서도 김장하 선생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철학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자란 한 소년은 학업을 이어가기조차 힘든 현실 속에서 진주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던 김장하 선생을 만났습니다. 자신이 번 돈을 어려운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던 김장하 선생. 그는 “돈은 똥과 같다. 묵히면 똥이 되지만 쓰면 거름이 된다”는 신념으로 살았습니다.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윤리적 자각이 깃든 철학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 장학금 덕분에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판사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더 인상 깊은 건 그의 말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유일한 잣대로 삼아 살아왔다” 받았던 도움을 빚으로 여기지 않고, 사회에 갚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는 늘 약자의 편에 서는 판결을 해왔고, 민주주의의 원칙 앞에서 단호했던 것 같습니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4일 오전 11시 22분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의견은 갈리고, 이념과 감정의 파도가 요동칩니다. 하지만 그 탄핵 판결의 배경에는 단지 법조문만이 아니라, 삶을 통틀어 쌓아온 어떤 신념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형배 대행에게 ‘헌법’은 종이 위의 문장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김장하 선생이 보여주었던 ‘쓰는 것’의 윤리, ‘베푸는 것’의 정의, ‘책임지는 것’의 용기를 포함하는 더 큰 공동체의 약속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형배 대행은 아마도 그날, 김장하 선생의 말을 다시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묵히면 똥이 되고, 쓰면 거름이 된다’ 어떤 권력도, 어떤 명분도, 공동체를 위한 거름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썩어간다는 뜻. 그는 그 말을 거름삼아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정의와 책임을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질문을 받아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것을 묵히고 있는가, 또 어떤 것을 거름으로 쓰고 있는가. 법이든 말이든, 마음이든 말입니다. 김장하 선생의 삶은 조용했고, 문형배 대행의 걸음은 성실했습니다. 그 둘이 쌓아온 시간의 무게가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그 울림을 들을 준비가 돼 있을까요?
오늘도 우리는 거름이 되는 말을 해야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을 말을요. 그게 비록 작고 소박한 한마디일지라도, 누군가의 내일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믿고 싶습니다. <김영희 디지털콘텐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