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 속에 사는 ‘잘피’라는 풀을 아시나요? 여느 해초처럼 흐늘흐늘 움직이며 듬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잘피가 파도의 힘을 줄이고, 모래가 쓸려나가지 않도록 붙잡고, 어린 물고기와 조개가 살아갈 자리를 내어줍니다. 동해 연안에서는 이런 토종잘피의 특징을 활용해 ‘살아있는 방파제’를 만들고, 연안 침식을 줄이는 동시에 수산자원을 보호하려는 연구도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피를 조금 다르게 보니 더 흥미롭습니다. 잘피는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먼저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햇빛을 받고, 영양분을 얻으며 자기 삶부터 이어갑니다. 자신이 살아 있으니 모래를 붙잡을 수 있고, 자신이 자라 있으니 작은 생명들도 그 곁에 머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좋은 사람을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과 같은 뜻으로 생각합니다. 부모니까 참아야 하고, 선배니까 양보해야 하고, 책임자니까 힘든 내색을 하면 안 된다고 여깁니다. 남을 챙기다 정작 자신은 뒤로 밀어두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도 계속 퍼주기만 하면 언젠가는 바닥이 납니다. 스마트폰도 스마트워치도 충전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꺼지는데, 사람에게만 무한 배터리를 요구하는 것은 조금 억울한 일입니다.
잘피는 자신을 지키는 일이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내가 건강해야 가족을 돌볼 수 있고, 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내 삶이 단단히 뿌리내려야 누군가 잠시 기대어 쉴 자리도 생깁니다. 그러니 가끔은 남을 위한답시고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쉬고 싶을 때 쉬고,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고, 나를 돌보는 일에 조금 더 당당해져도 괜찮겠습니다.
바닷속 잘피가 다른 생명을 품는 비결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이 살아남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래도록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도 그와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부터 잘 살아 있는 것 말입니다. <김영희 디지털콘텐츠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