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을 읽다 보면 혹서(酷暑) 관련 기록을 적지 않게 만납니다. 자연스럽게 얼음 창고, 빙고(氷庫) 이야기도 보입니다.
세종12년(1430년) 여름은 무척 더웠습니다. 세종은 7월25일 건축공사 중단 명령을 내립니다. “혹심한 더위에 접어드니 각처의 건축공사를 정지하게 하라.”
예종1년(1469년) 7월20일 기록에는 무더위로 군정(軍政)이 중단된 사실이 보입니다. 예종이 하명합니다. “근래 혹서와 오랜 가뭄으로 친히 검열하지 못했는데 더위도 물러가고 비도 왔다. 장차 군진(軍陣)을 검열하겠다.”
무더위로 교정 행정이 변화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종10년(1479년) 7월27일 일입니다. 경연후 시독관(侍讀官) 이세광(李世匡)이 왕에게 아룁니다.
“정윤정(鄭允貞)이 사리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소장을 올린 것은 죽어도 남을 죄입니다. 그러나 언사(言事)로써 고문을 동원한 심문에 의해 죽는다면 언로(言路)가 어찌 되겠습니까? 바야흐로 혹서인데 이미 세 차례나 형신(刑訊)했는데 또 형을 더한다면 죽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도 가세합니다. “정윤정은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후세에 언사(言事)로써 죽었다고 말한다면 어찌 누(累)가 있지 않겠습니까?”
왕이 마침내 정윤정을 풀어 주도록 했습니다. 무더위를 명분으로 선비와 언로를 지킨 사례입니다.
비슷한 기록은 성종15년(1484년) 7월11일에도 보입니다.
성종이 지시합니다. “이처럼 호된 더위에 가벼운 범죄로 갇혀 여러 날 동안 형문(刑問)을 받다가 억울하게 그 목숨을 잃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내가 애처롭게 여긴다. 강상(綱常)에 관계되거나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자, 강도·절도 외에는 더운 철 동안 보증을 세우고 풀어주어 그 목숨을 보전하게 하라.”
혹서기를 맞아 조속한 재판 진행과 적정한 죄수 관리를 상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광해군14년(1622년) 5월5일 의금부가 오랜 기간 추국하지 않아 죄인이 적체되자 하루빨리 판결을 내리도록 왕에게 건의합니다. 하지만 쇠귀에 경 읽기로 끝났습니다.
“본부에서 오랫동안 추국을 하지 않아 죄인이 많이 적체됐습니다. 무더운 계절이 되어 열기가 막 찌는 듯합니다. 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전염되어 감옥에 있는 자들이 모두 병에 걸리게 됩니다. 형벌도 받지 않은 채 죽게 될 것입니다. 의금부를 설치한 것이 어찌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대신들이 의논해 처리하고 본부(本府)가 살펴 아룄던 죄인들에 대해 최종 판결을 하지 않은 채 가두어 두기만 하고 판결을 내릴 기약이 없습니다. 감옥이 가득 차 있는 것은 성세(盛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형벌을 내리든지, 방면하든지, 귀양을 보내든지, 유배하든지 빨리 비답을 내려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사신(史臣)은 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근년 이래로 옥사(獄事)가 자주 일어났는데 법망이 너무 조밀하여 죄없는 자들까지도 모두 걸려 들었다. 심한 경우에는 한겨울 혹한과 한여름 무더위에 죽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도 판결을 내려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바람에 의금부의 요청을 끝내 헛되게 하였으니 애석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