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바보에게 벗이 있으니 예덕(穢德) 선생입니다. 선생은 종로 탑골에 사는데 똥거름을 쳐내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동네에서 엄 행수(行首)로 통했죠.
어느 날 간서치(看書癡)의 제자가 말했습니다. “엄 행수는 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스승이라고 하면서 벗이 되려고 하시니 부끄럽습니다. 문하를 떠나려 합니다.”
책바보가 웃으며 답했습니다.
“장사치는 잇속으로, 양반은 아첨으로 벗을 사귀네. 아무리 친해도 세 번 달라고 하면 멀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고, 아무리 원수라도 세 번 주면 친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네. 하지만 잇속으로 사귀면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면 오래가지 못하네.
엄 행수는 나에게 알고 지내자고 하지 않았네. 그저 내가 찬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네.
사람 똥, 말 똥, 소 똥, 닭 똥, 개 똥, 거위 똥, 돼지 똥, 비둘기 똥, 토끼 똥, 참새 똥…. 똥이란 똥을 모조리 거두어 가도 말할 사람이 없네. 혼자 이익을 남겨도 말할 사람이 없지. 많이 긁어모아도 양심이 없다고 말할 사람도 없네.
왕십리에 무, 살고지에 순무, 석교에 가지·참외·호박, 연희궁에 고추·마늘·부추·파, 청파에 미나리, 이태인에 토란을 아무리 최고의 밭에 심어도 엄 행수의 똥을 가져다 가꿔야만 풍년이 든다네.
그는 아침에 밥 한 그릇을 먹고 저녁때가 되고서야 또다시 한 그릇을 먹네. 누가 고기를 권하면 고기나 나물이나 배부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입에 당기는 것을 찾아 먹어 무얼 하느냐고 하네. 옷을 차려입으라고 하면 넓은 소매는 익숙지도 못하고 새 옷을 입고서는 짐을 지고 다닐 수 없다고 하네.